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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소] 왈도의 소곤소곤 이야기-오늘의 불쾌지수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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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소] 왈도의 소곤소곤 이야기-오늘의 불쾌지수 ③
  • 서다민
  • 승인 2020.12.11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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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왈도(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는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연재됩니다.

작가 왈도(필명)씨
작가 왈도(필명)씨

병환은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의 법학과에 턱걸이로 진학했다. 하지만 턱걸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소원대로 서울에 있는 대학의 법대생이 됐다는 것만으로 병환은 집안의 큰 자랑이었다. 병환의 아버지는 마을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고, 어머니는 집 마당에 잔칫상을 차렸다. 몇 몇 까칠했던 동네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병환의 법대 진학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날은 밤새 술판이 벌어졌지만, 누구 한 사람 시끄럽다고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탓일까. 병환의 인생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학 3학년까지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한 병환은 5년차에 덜컥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때가 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10년이 지나도록 더 이상의 합격 소식은 없었다. 병환이 낙향하던 날, 병환의 어머니는 몸져누웠고, 아버지는 20년 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병환의 내리막길은 끝을 알 수 없었다.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방탄유리보다 더 견고했고, 연애는 사치였다. 맞선은 끊긴지 오래였다. 판검사 명함은커녕 이력서조차 쓰기 민망한 상황이 되자 고향 친구들도 하나, 둘 멀어졌다. 고교시절 무료 과외를 해줬던 친구는 건설사 사장이 됐고, 지방에 있는 전문대학 미달 학과에 겨우 들어갔던 친구는 공무원이 됐다. 가끔 소주라도 사주는 나기영 기자가 유일하게 남은 친구였다.

*

 동네 창피하니까 낮에는 돌아다니지 말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병환은 매일 어둠이 깔려야 집을 나섰다. 안 군수와 마주친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선 길이었다.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날은 아무 생각 없이 군청 앞 잔디광장까지 꽤 먼 거리를 가게 됐다. 잔디광장은 사방에 울타리가 둘러 쳐있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강아지가 푯말 앞에서 ‘킁킁’ 거리더니 오줌을 쌌다.
 뉴스에서는 푹푹 찌는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고 했지만, 저녁인데도 끈적끈적한 땀이 눌러 붙어 짜증은 더 났다. 탁 트인 잔디광장이었지만, 바람 한 점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드넓은 잔디광장은 앉아 있을만했다. 앉으니 눕고 싶었다. 누워서 바라본 하늘은 별 하나 없이 잔뜩 찌푸려있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눅눅한 바람에 서글프게 지나간 십 수 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울적한 기분이 눈 밑까지 올라왔을 때 강아지가 짖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병환은 벌떡 일어나 강아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인기척이 가까워오자 더 격렬하게 짖어댔다.

 “쉿! 조용! 조용!”
 소용없었다. 이미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다섯이었다. 강아지를 안고 뛰었어야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강아지는 더 거칠게 짖어댔다. 병환 앞에 선 일행 중 한 남자가 으르렁 거리는 강아지를 발로 툭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누가 잔디광장에 개새끼를 끌고 들어오라고 했나? ‘출입금지’ 푯말 못 봤어?”
 병환은 남자를 올려다봤지만 가로등 불빛을 마주하고 있어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남자가 군수라는 사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 이거, 잔디광장 통제도 하나 제대로 못하나?”
 “죄송합니다. 군수님! 철저히 통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들 당장 치워!”
 안 군수의 호통에 옆에 서있던 사내들이 다짜고짜 병환의 팔짱을 끼고 잔디광장에서 끌어냈다. 강아지도 개 줄에 질질 끌려왔다. 안 군수는 잔디 밖으로 쫓겨나는 병환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병환은 수치심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병환은 안 군수를 쫓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안 군수는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를 타고 유유히 군청을 빠져 나갔다. 쫓겨난 병환은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나 기자, 술 한 잔 사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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