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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칼럼] 이대건 박사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애란인은 난초 이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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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칼럼] 이대건 박사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애란인은 난초 이름을 남긴다"
  • 윤진오
  • 승인 2021.01.15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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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명장 이대건 박사
농업명장 이대건 박사

[동양뉴스] 세상의 모든 생명체에는 종족을 번식하려는 유전자가 내재해 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려 대를 이어가려 한다. 동물이나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욕구가 누구에 게나 있다. 한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루고 자기 이름으로 된 흔적을 남기려 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 살다 간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한국춘란을 가까이하면 자신의 이름으로 된 난초를 남기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사람이 자식을 낳고 이름을 붙여 호적에 올리는 과정이 춘란 세계에서도 흡사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춘란도 명품의 자질이 있는 난초를 자식의 이름을 짓듯이 지어서 등록할 수 있다. 이름해 명명(命名)이라고 하며 그렇게 등록된 품종을 ‘명명품’이라고 한다. 명명된 품종은 난인들이 그 이름을 일본, 중국, 대만, 한국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고 인식한다. 이것이 국가마다 행해지는 범국가적 신규 품종 발굴 사업이다.

동양란을 비롯해 춘란은 야생에서 자란 것 중 꽃이나 잎에 일반종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특성의 예(藝)가 잘 나타난 것을 채집해 이를 다듬고 재배한다. 채집가가 직접 기르기도 하고 전문 농장으로 분양해 전문가들 손에 배양되기도 한다. 이때 유전적으로 안정성이 좋은 것을 선별해 나름대로 예명(豫名)을 붙인다. 전시회나 시합에 출품해 난계에서 인정을 받으면 명명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렇게 한 품종이 나타나면 그 이름이 춘란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한다. 그 춘 란을 명명한 사람의 이름과 에피소드까지 함께 길이길이 남는 것이다.

한국춘란의 대부분은 우리 산야에서 나온 자연산이다. 자연속에 자라는 우수 한 종들을 발굴해 작품을 만든다. 50년 한국춘란 역사에서 야생 상태로 산채가 되어 증식된 품종의 수가 무려 10만종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에서 우수한 품종은 족보를 만들어 등록되고 그때부터 한 국가를 대표하게 되며 명명자의 얼굴이 된다. 지금까지 명명된 종수는 약 3천 품종에 달한다. 명명된 품종 중 우수한 것은 이웃 일본과 중국에 수출되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난초가 국경을 넘어 유구히 남는 것이다. 내가 명명한 천종이 일본으로 수출되었을 때 그 쾌감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등록된 난초 중 엄격한 심의를 거쳐 각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품종을 매년 뽑아 발표한다. 이를 ‘명감’이라고 칭한다. 그 해의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예를 안게 되는 것이다. 춘란 분야의 국가대표는 특별한 사람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다만 나라마다 난계가 인정할 만한 유전자적 특성을 가지고 나라마다 국수풍이 확실하며 자연생이든 교배종이든 이력이 정확해야 한다.

동양란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최고로 치는 게 춘란 포레스티(Cymbidium forrestii ) 이다. 중국 춘란의 사천왕의 1번이 송매(宋梅)이다. 너무 잘생기고 향기가 좋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청나라 건륭시대(1736~1795) 소금장수였던 송금선이라는 사람이 소금을 팔러 가다 잠시 쉴 때 망개 덩굴 밑에 핀 꽃 을 발견했다. 이후 송금선 씨가 기르던 매화꽃을 닮은 난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져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나는 1995년 조일소로 시작해 2018년까지 67품종을 명명하였다. 업계 최다이다. 나는 산채품의 경우 들여올 때부터 태명을 붙인다. 기르다가 어느 정도 작품의 윤곽이 나오면 예명을 붙인다. 그러다 명명의 기회가 되었을 때 다른 명명품과 겹치지 않는가를 확인한 후 바로 등록 신청을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한민국난등록협회, 한국난등록협회, 한국난품종등록협회를 비롯해 세 곳에서 심의를 거친 후 명명이 확정된다. 나는 대한민국난등록협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명을 결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심사기준을 거친다. ‘중복되는 품종이 있는가? 누가 봐도 국산이 맞는가? 필수 옵션을 잘 갖추었는가? 수상 이력은 어느 정도인가? 등록하고자 하는 계열의 룰에 부합하는가?’
이외에도 명명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따져서 하나의 산채품이 품종화된다. 처음에 만난 주인이 명명을 하기도 하고, 저명한 프로들에게 보급해 그분들의 이름으로 명명을 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명명하는 경우도 있다. 명명할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단독으로 또는 공동으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주금화 ‘화성’의 경우 나와 다른 두 사람이 합쳐 3명 이 공동으로 명명했다.

자연산으로는 세계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의 위업을 달성한 ‘천종’은 2016 년 10월에 나와 선배인 한국애란협회 초대회장인 류정열씨가 함께 명명했다. 난계에 좋은 품종을 등록했다는 일과 나의 이름이 좋은 품종과 함께 영원히 남을거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다. 다음 신품종도 준비를 마쳤다. 난계에 입문한 초창기부터 익힌 복륜기술을 바탕삼아 산채품 복륜을 구해 길렀는데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잎은 성체가 되어도 12cm를 넘기지 않는다. 금계열 산반 무늬에 복륜 잎이다. 거기에 원판, 심대복륜, 황색에 화근이 없는 아주 귀한 품종이 대기중이다. 예명은 ‘산하’이다. 산과 물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춘란에 입문해보길 권한다. 혹시 아는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난초가 생기고 그 이름이 후세에 길이길이 남게 될지. 춘란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금도 그런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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