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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가을 정서(情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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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가을 정서(情緖)
  • 서다민
  • 승인 2022.09.27 10:4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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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범 교수의 세상을 보는 눈 ㉚
강경범 교수.
강경범 교수.

[동양뉴스] 추분秋分을 기점으로 제법 완연한 가을빛을 나타내며 밤낮으로 쌀쌀하기 그지없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도 구름을 동동 띄우고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가듯 장강의 기운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아 가을이구나 하는 사이 세월은 올해도 거르지 않고 삶에 책임을 묻기라도 하듯 일찌감치 도장 받으러 어김없이 달려온다. 평상平牀에 앉아 십. 십일. 십이. 숫자 놀음에 취할 때쯤 삼 개월 남짓 남겨놓은 달력을 바라보며 불현듯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다듬지 못한 뾰족한 기운에 짓눌리며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가치를 기준 삼아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는지, 약한 자에게 훈계라는 명목의 잣대를 들이밀며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공감과 배려를 핑계 삼아 억울하게 한 것은 없었는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체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왜곡된 현실의 내 모습에 숨겨놓은 뾰족한 감정의 골이 얼굴을 내미는 모습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적당한 값도 계산하지 않고 공짜로 밤과 꾸찌뽕을 얻어먹는 가을 산이 선물한 소중한 즐거움에 빠져들기 위하여, 총총걸음으로 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가을이 익는 숲으로 향하였다.

가을밤 정서에 취해 달빛으로 조명을 달고 숨바꼭질하는 감정들을 들춰내 보았는가. 아마 감추어 놓은 얼굴의 표정을 숨기지 못하리라. 미움, 분노, 슬픔, 인색함 등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의 한편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못된 사고들은 상처를 준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유무에 판단 없이 연약한 자를 찾아 나선다. 물론 죄의 값에 따라 상대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힐 때도 있지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정서상 상처를 준 그들보다 오히려 능력과 한계를 원망하며 자신에게 비수를 꽂는 슬픈 현실과 마주친다.

세상 누구라도 타인의 영역에 함부로 침입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가족도 예외일 수 없다. 그들은 당신의 조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한계를 느끼며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다가서는 이유는 서로 위안 삼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체의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사회적 관계는 이제 조직의 범주를 넘어 보이지 않은 가상의 공간에서 서로에게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있다. 물론 다양한 정보교환의 방법이 존재하겠지만 특히 클라이언트의 욕구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접근하는 방법중 하나는 첫인상이 아닐까.

“물도 에너지를 교환”한다는 프랑스 국립보건의료연구원의 연구실장이던 자크 방브니스트(Jacques Benveniste, 1935~2004)는 “물의 기억력”에 관한 논문을 쓰며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 13명의 다양한 국가의 면역학 연구실에 의뢰한 후 4년간의 연구 끝에 1988년 네이처(Nature)지에 발표한 인체의 에너지장(파동)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場이 존재하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도 찬반양론의 대립각을 보이고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 속에서 개방과 폐쇄, 그리고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고심하는 것보다 각자 스스로 건강한 에너지를 생성하여 웃음과 행복을 선사할 때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임을 직감한다. 어쩌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간직한 체 옷깃만 스쳐도 좋은 인연의 고리가 연결되지 않을까.

세상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 속의 각종 규범과 예의, 법의 잣대 양심 등을 빌미로 타인에게 무례를 범한다. 필자 또한 다듬어지지 않은 뾰쪽한 감정의 비수를 들 때가 있으니 그중 하나임을 직시한다. 변화하는 환경과 세월 속, 세 치의 혀에서 나오는 악마의 기교에 휘둘림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모진 세월의 아픔이 내 숨에 묻어 나온 것에 깊은 안도감을 찾는다. 가을 녘 꼭꼭 숨겨놓은 상처받은 미움이 있다면 용서할 수 있는 용기로 다가서 보자. 인간의 존엄은 그 한계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에 누구든 함부로 조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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