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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산진경찰서 파괴한 박재혁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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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산진경찰서 파괴한 박재혁 의사"
  • 남윤철
  • 승인 2014.09.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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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보훈과 김미정


최근 17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이순신 신드롬을 불러오고 있는 영화 명량!

8월초 직장선배와 함께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동은 영화 관련 이야기가 이슈화 될때마다 밀려온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다. 또한 죽고자하면 살것이니!” 많은 명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또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에서 승리한 후 만신창이가 된 대장선 격군실의 노꾼들이 노를 놓고 앉아 "나중에 우리 후손 아그들이 우리가 이리 개고생한 것을 알기는 알까? "모르면 참말로 호로자슥들이제!" 하며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날의 자유로움과 풍요로운 삶을 누릴수 있게 해준 우리 선조들,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겹쳐져 마음을 울렸다.  

후손인 우리는 정말 잊지 않고 있는 것인가?

94년 전 1920년 9월 14일 민족의 피로 얼룩진 부산경찰서를 파괴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박재혁 의사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다니며, 학창 시절부터 반일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최천택ㆍ오택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등사 · 배포했다.

또한 부산진 출신 죽마고우들과 함께 평상시에는 항일투사의 국내 연락처 역할을 하고, 유사시에는 비밀결사대로 활동하기 위해 구세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15년 학교를 졸업한 박 의사는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고, 국외에서 항일투쟁의 뜻을 같이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0년대 전반의 의열단은 강도 높은 암살과 파괴 방식으로 의열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창단 직후 국내 주요 일제 기관들을 폭파하고자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고, 의열단 탄압에 앞장 선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한 박재혁 의사의 거사가 추진된 것이다.

1920년 4월 부산에 돌아온 선생은 당시 부산경찰서장인 하시모토가 고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고서상으로 가장하고 잠입하여 숨겨 놓았던 폭탄을 투척했다. 하시모토는 병원에 이송되는 도중에 절명하였고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직후 의사는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었다.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한 뒤 단식을 한 선생은 1921년 5월 11일, 순국하였다.

부산 부산진구 어린이대공원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생명을 아낌없이 바친 투철한 사명감을 표현하기 위해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전진하는 모습의 박재혁 의사 동상이 있다.

이는 굳은 의지와 애국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 석상군상은 온 국민의 함성과 태극기의 물결로 사랑과 믿음 협동정신을, 삼각형의 구도와 삼단계의 좌대는 3.1독립운동을 상징화하고 있다.

오늘의 자유와 번영을 빚지고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우리는 일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민족 의지를 만천 하에 과시하고, 민족혼을 일깨운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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