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연재 수기 "감옥 체험기"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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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연재 수기 "감옥 체험기" 제2부
  • 박영애 기자
  • 승인 2012.09.2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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凍土 (동토-얼어붙은땅)
오늘도 제1부에 이어 나의 탈북연재 수기를 쓰려고 한다.
아직도 꿈에서 그때 당했던 스치심으로 잠을 잘수가 없다.
너무나도 가혹했던 아픔과 고통들...!
 
한국에 가려다가 붙잡혀 온 사람들은 취조를 받을 때마다 피투성이가 되어 나온다. 취조실에서는 고통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렸다.
 
보위부에서 안전부로, 다시 연사 보위부로

보위부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는데 안전부 감방에 수감된 사람들은 백여 명이 넘었다.

감방안은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고 사람이 앉아있을 자리도 없었다.

거기에다 바닥에는 이상한 벌레들과 벼룩들, 사람 몸에는 이들이 득실거려 조금만 움직여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숨이 막히고 토하고 싶다.

너무 더럽고 어지러워 그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서성대자면 곧 바로 취조실로 불려가 취조를 당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옥의 시간을 보낸다. 감방안에는 문짝도 없는 작은 쥐구멍만한 것이 있는데 그게 화장실이다.

보위부나 안전부나 화장실은 다 감방안에 있다.

문짝도 없는 쥐구멍 만한 화장실에서 소변도 보고, 대변도 봐야 하는데 물이 없어서 변을 보고도 내려 보내지 못하니 악취만 더 심하고 구더기들이 밖으로 나 돌아다니는 상황이다.

그때 그 감방 실정은 눈에 선하지만 머라고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그저 이 심정은 안타깝기만 하다.
 
옆에 남자 감방안에서 나이가 많아보이는 분이 담배를 몰래 피우다 들키고 말았는데 나이가 제일 어린 남자 군인은 그 분에게 담배를 어디에서 가져왔냐고 물으며 난로를 피우던 장작개비로 아버지 뻘 되는그 분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순간 바닥은 피로 물들었고 아저씨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자 방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아이는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남자와 여자 감방안에서는 매일 같이 반복되는 생활속에서 견디다 못해 혼란이 일어나도 선생들은 눈하나 끔쩍도 하지 않고 다시 패고, 다시 페인으로 만들고 사람을 다 죽여버린다.

무산 애들은 그 안에서 취급을 받고 재판을 받는데 한 여자애는 한국에 가려고 했다는 이유로 3년 판결결을 받자 시간은 금방 지나갈거라고 밖으로 나가면 다시 넘어간다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중국에 세번, 네번, 심지어는 다섯 번도 다닌 사람들도 있다.

횟수가 많은 사람들은 형벌이 심한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안전부에서 이틀을 보내고 내 고향 "연사" 보위부에서 데리러 와서 감방안에서 일은 비밀로 한다는 맹세를 다짐하고 다시 자리를 옮겼다.

연사는 작은 시골마을이라 거기까지 가는 차도 없어서 연사-무산, 사이에 빽빽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기차가 있어도 기름이 없어 다니지를 못하고 짐승 싫어 나르는 화물을 타고 가야 한다.
 
그때 나는 같은 연사에 있는 임산부와 함께 가게 되었는데 달아난다고 우리 두명의 손에 같이 족쇠를 채웠다.

11월의 혹독한 한파의 추위와 함께 딸랑 겉옷 한벌을 입고 꽁꽁 얼어붙은 족쇠는 바깥 공기에 순간 고름이 붙어있고 한번씩 움직일때마다 손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도망안친다고, 풀어주면 안되냐고 그러자 선생은 '이 종간나 에미나이들이 나라를 배신하고 먼 말들이 그렇게 많냐' 고 또 구두발로 여기 저기 차고 때리고 질질 끌고 갔다.

무산에서 연사까지 기차를 타면 두 시간 거리지만 짐승 실어 나르는 화물차 타고 우리는 10시간 넘게 얼음덩어리가 된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도착했다.
 
고향땅을 밞아도 그리운 집에는 들어도 못가고 또다시 시작된 철창 신세

연사 안전부 구류장에는 우리를 지키는 계호 선생들이 다섯명 있는데 무산에 있는 선생들보다 더 심하게 우리를 사람취급 안한다.

찬 바닥에 머리를 대고 허리를 굽히고 발굽만 붙이게 하고 그렇게 한 시간을 있어야 한다.

10시간 넘게 화물을 타고 온 몸은 얼음으로 뒤덮인 상태에 그런 취조를 당하자니 너무 힘들고 이대로 죽어버리자 라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힘이없어 자꾸 넘어지자 계호 선생들은 여러명이 붙어서 나를 구둣발로 들이차고 '이 간나야 콱죽여버리기 전에 허리를 굽혀'라며 '중국에 가서 그만큼 호강 하고 살았으면 이만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지, 다시 움직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얼굴에 침을 뱉어 버렸다.

나는 그 치욕함을 당하고도 힘없이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기합은 끝나고 감방에 들어가는데 그래도 무산 감방 보다는 많이 깨끗해 보이는 방이 4개 있었다.

아침 5시 기상에 죽도록 청소를 시키고는 밥 먹을 시간까지 움직이지 말고 앉아있어야 한다.

너무 빨리 기상을 시켜 가만히 그냥 앉아만 있을려니 밀려오는 피곤에 나도 모르게 끄떡 끄떡 졸다가 들켜서 무릎을 끓고 앉아 벌을 받기도 했다.

다음날 나는 문건 작성 해야 되서 불려 나갔다가 '고향이 어디냐?,나이는 몇이냐? 중국엔 언제 갔냐?' 다 그런 조사, 나는 '고향이 함흥'이라고 하자 거기에 있던 선생들이"야 너 고향이 함흥이야? 반갑다야. 한고향이잖아?"그러면서 반가워한다.

거기에 있던 다섯명의 선생 중에 세명이 함흥 사람이다.

그래도 같은 고향이라고 조금은 봐주었고 다른 애들처럼 그렇게 험한 말도하지 않고, 때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취급 받을 떄는 숨이 막혀버린다.

'한국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났고, 드라마는 어떤 것을 보았고, 중국 어디에 다녔으며, 같은 북한 사람은 몇 명 만났고, 제일 집요하게는 교회를 다녔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교회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우겨도 물어본 말을 몇번이나 되물어 보다가 혹시 거짓말 처럼 들리면 아무 이유 없이 또다시 시작된다. (고문)
 
나는 중국 연변에서 좀 지내왔기에 사투리를 한다고 더 많은 벌을 받았고  한번 말을 잘 못하면 살창 모서리에 무릎을 대고 손으로 살창을 쥐게 하고 한 시간을 서있게 한다.

나에게는 그렇게 주는 벌이 제일 힘들었지만 그래도 한국 행을 시도 하다 잡혀온 사람들 보다는 양호 한것이다.

한국에 갈려다가 잡혀온 사람들은 취급 받을 때 마다 온 감방이 떠나 갈듯한 고함 소리에, 또한 바닥은 피투성이다
 
우리는 조사 받을 때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운다.

그 안에서 내 번호는 24번이다.

24번하고 부르면 큰 소리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나가야 한다.

만약에 소리가 약하고나 순종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사정 없이 때리고 작은 개구멍 만한 문으로 나가 머리를 땅에 대고 박아야 한다.

다른 계호들은 그래도 그렇게 심하게 때리지는 않지만 혜산에서 온 선생은 제일 악독하게 우리를 때리고 밟고 피 토하게 한다.

하루는 내가 감기에 걸려 열병이 심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나에게 차려진 강냉이 죽조차 먹을수 없게 되어 다른 친구에게 먹으라고 하는걸 그 선생에게 들키고 말았다.
(감방안에서는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넘겨줄수가 없다.)

그러자 그 선생은 나보고 양말을 벗으라고 하더니 그 양말을 내 밥그릇에 넣어 휘젓더니 꺼내라고 한다.

나는 순간 치떨림을 참고 그 양말을 꺼냈더니 아니 글쎼 나보고 그 강냉이 죽을 먹으라고 한다.

내가 먹지를 않고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으니 그 선생은 한 감방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까지 무릎을 끓고 손은 뒤짐을 쥐게 하고 발끝으로 뻩히게 하는 벌을 준다.

참다 못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으로 가져 갔다가 끝내 먹지 못하자 선생은 나와 같은 감방 사람들  모두  다섯시간 동안이나  벌 받게 하고 그래도 먹지 않자 그 죽 그릇을 가져와서는 억지로 내 입으로 마구 쏟아 넣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 그 밥 그릇을 확 밀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 선생은 "야 이 간나야 너 오늘 죽어봐라" 그러더니 날보고 손을 내밀라고 한다.
 
내가 살창 밖으로 손을 내밀자 손가락 만한 쇠꼬챙이로 내손을 사정없이 내리치자 금방 퉁퉁 부어올라도 그냥 때린다.
 
나는 너무 아파서 엉엉 울면서 속으로 '이 자식아 너 이제 천벌을 받을 거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선생은 보름 만에 후송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감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지독하게 굴더니 벌을 받고야 말았다고, 하나님이 천벌을 주셨다고,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은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열흘이 지나자 나도 면회가 됐다.

면회는 일주일에 두번 이지만 가족들이랑 만나서 말을 하는게 아니고 집에서 보내오는 음식만 그저 먹을수 있다.
 
음식도 마음 편히 먹지 못하고 선생들이 보는 앞에서 먹어야 한다.

혹시나 음식에 뭐가 따라 들어오지 않나 검사를 해야 하고 면회 오는 사람들 다 같이 나가서 먹어야 한다.
 
남자들은 미친 짐승 마냥 사정없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먹는다.

(제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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