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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천국과 지옥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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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천국과 지옥 3년
  • 박영애 기자
  • 승인 2012.09.28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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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북한정치범 수용소해체본부 발간, '죽음의 경계에서 탈출한 12인의 증언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체를 밝힌다'에 게재된 탈북자 김수철(요덕수용소, 1997~1998 수감)씨의 증언.
 
한국방송을 듣던 진짜 반동분자 
나는 국경수비대(5454부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던 중 체포되어 요덕에 수감되었다.
 
그 부대는 해안국경 수비부터 수용소 관리까지 맡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대규모 부대였다.
 
복무 당시 나는 대대장 운전수를 했는데 대대장보다 대대정치지도원의 권력이 더 셌기 때문에 대대장 차를 거의 대대정치지도원이 타고 다녔다.
 
당시 대대정치지도원은 북한 외부에 관심이 많고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한국 방송이나 중국 영상을 보는데 거부감이 없었고 심지어 탈북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
 
하지만 간부이다 보니 거동이 조심스러웠기에 탈북을 돕는 임무는 수하인 내 몫이었다.
 
나는 북한주민들의 탈북을 돕는 일을 2~3년 정도 지속하던 중 1991년도 8월에 잡혔다.
 
1992년이 김일성 탄생 80돌이었던 까닭에 91년도부터 간부들 간의 충성 경쟁이 대단했다.
 
실적 경쟁 과정 속에서 대대장과 참모장이 대대정치지도원의 약점을 잡기 위해 지속적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가운데 대대정치지도원과 내가 주민들의 탈북을 도운 것이 발각되었다.
 
우리가 탈북을 도왔던 한 여자가 중국에서 잡혔는데 심문 과정에서 우리의 개입 사실을 자백한 것이다. 보위부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몰래 내 차에 도청장치를 달았다.
 
당시 우리는 차 안에서 한국 방송을 듣곤 했었는데 그게 도청장치에 딱 걸리고 말았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방송을 듣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고 매우 중대한 죄로 취급되었다. 체포된 대대정치지도원은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는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다.
 
나와 탈북에 관여했던 또 다른 한 명은 아버지가 서해담당 수산위원회 간부였기 때문에 보위부 구류장까지 갔다가 석방되었다.
 
대대정치지도원은 중앙당에 지인이 있었지만 죄가 너무 중했던 탓에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나중에 요덕에서 석방된 이후 대대정치지도원의 행방을 수소문 했지만 그의 가족도 찾을 수가 없었다.
 
체포부터 요덕으로
 
1991년도 8월 1일 보위부장이 찾는다는 소리에 나는 대대정치지도원과 함께 5454부대 본부에 있는 우리 부대 담당보위부로 갔다.
 
대대정치지도원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나를 불러 방으로 들어가자 보위부원들이 다짜고짜 족쇄를 채웠다.
 
그들은 ‘잘 반성 좀 해 보라’는 말과 함께 나를 사동구역 안전부에 감금시켰다.
 
약 20일 정도를 그곳에서 머물다가 평성에 있는 도 보위부 구류장으로 이송되었다.
 
구류장에서 8개월이 지나고 구류장 경비는 처음 나에게 ‘좋은 곳’에 간다고 말했다.
 
내가 속했던 5454부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난 후 비닐 포장에다가 돼지고기와 밥을 잔뜩 싸주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난 어디론가 호송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부대에서는 도시락뿐 아니라 새 배낭과 새 군복 두 벌, 새 신발, 겨울내의, 면내의, 속옷, 비누, 양말까지 챙겨줬다.
 
이송 되는 동안 족쇄도 차지 않고 자유롭게 식사를 했는데 굶주리고 나약한 상태의 수감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아수라장이 됐다.
 
밥을 먹으면서 도망칠 수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도로 한 쪽은 절벽이고 반대쪽은 가시넝쿨이 얽혀있는 곳이라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지형이었다.
 
우리는 혁명화구역인 대숙리에 도착해 외래자반에 들어갔는데 앞으로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나중에 한국에서 다른 수용소 출신 생존자들에게 들으니 수감생활을 몇 년 한다고 알려주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요덕에서의 생활
 
나는 약 20일 정도를 외래자반에서 보낸 이후 농산반에 배치되었다. 모임에 살짝 늦었는데 담당보위지도원 김형섭이라는 사람이 나를 보고 아버지가 김책공대 졸업하고 자기 자신은 국경수비대원까지 했는데도 국가를 배신했다면서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망신을 주었다.
 
요덕수용소를 관리하는 5454부대 출신이다 보니 나를 더 미워했던 것이었다.
 
당시 담당보위부원이 농산반 작업반을 군대처럼 개편해 버렸는데 내가 있던 1소대의 소대장으로 수용소경비를 하던 김철웅이 오게 되었다.
 
나는 김철웅과 딱 붙어 다니던 사이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1994년 1월까지 약 2년 동안 비교적 편하게 수용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개월 후에는 식당 땔감을 책임지는 화목공을 하게 되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무를 하러 다니기 때문에 수용소 내를 비교적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식당에서 밥을 더 얻어먹을 수도 있었다.
 
수용소 내엔 10년 이상 수감생활을 한 재일교포들이 있었다.
 
70년대 재일교포들의 대규모 이주가 있은 뒤 많은 재일교포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오랫동안 석방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
 
미화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수용소 내에서 남자관계가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담당보위부원, 내부지도원, 소대장 등과 사귀면서 도움을 받아 살아갔는데 당시에는 담당보위부원과 만나고 있었다.
 
나는 1994년 1월 담당보위부원 김형섭과 미화의 관계를 고발하는 투서사건과 지난 93년 가을에 몰래 트랙터를 몰다가 망가뜨린 사건을 빌미로 구류장에 수감되게 되었다.
 
 그리고 95년 해제될 때까지 농산반에 배치되어 남은 1년을 중노동에 시달리며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투서사건, 그리고 구류장
 
내가 구류장에 간 것은 철웅이의 투서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얽히고설킨 남녀관계의 희생물이 되었다.
 
담당 보위부원은 김철웅이 익명으로 투서를 넘긴 것이었기 때문에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잡을 명분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철웅이의 절친이었을 뿐 아니라 트랙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구류장에 넘길 명분이 있었다.
 
이전부터 김형섭은 가장 추울 때 나를 구류장에 넘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구류장으로 가던 날 김철웅이 미리 귀띔을 해줘서 나는 구류장에 갈 채비를 단단히 했다.
 
겨울내의와 겉옷을 몇 겹씩 껴입어서 걷기도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을 본 김형섭은 부아가 치밀었는지 요덕수용소 정문에 위치한 구류장까지 80리를 따라 내려와 내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구류장엔 겨울인데도 벼룩이 엄청나게 많았다. 산골의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입고 간 옷들 때문에 더워서 잠이 들어버렸는데 그걸 본 구류장 보위부원이 내 옷을 벗기고 창문을 열었다.
 
모포 두 장을 주긴 했지만 거의 맨몸인 상태로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루는 구류장 보위부원이 나에게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고 오라면서 잠시 내보내 주었다. 돌아와 보니 천장에 도청장치가 붙어있었다.
 
그날 저녁 김형섭이 구류장에 내려와 투서를 한 사람이 누군지 말하라고 했다. 나는 모른다고 잡아떼자 김철웅을 내가 갇힌 감방에 수감할 테니 자백을 받아내라고 했다.
 
김철웅이 감방에 들어온 날 나는 도청장치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을 것 같아 동작으로 알려주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화장실 벽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글을 써서 알려줘 순간을 모면했다. 결국 김형섭은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자 홧김에 나를 한 달 이상 구류장에 방치했다.
 
40일 만에 구류장에서 나와 대숙리로 돌아갔는데 모두들 내가 죽었거나 완전통제구역에 간 줄 알았다고 말했다.
 
요덕정치범수용소의 생활
 
1995년 2월 해제되기까지 수용소에서는 아침 5시 반쯤 기상하여 아침을 먹고 저녁 7시까지 일하고 숙소에 들어가 10시에 인원점검 후 취침을 했다.
 
수용소에는 소규모 수력 발전소가 있어서 전기가 공급되었는데 겨우 불을 켤 수준이긴 했지만 정전이 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주식은 쌀은 전혀 들어가지 않고 순옥수수로 만든 통강냉이밥이다. 퍽퍽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운 거친 밥이라서 먹다 보면 온 몸에 껍질이 일어나고 입천장이 헐어버린다.
 
그래서 쥐나 개구리, 뱀을 몰래 잡아먹었다.
 
 함께 나눠먹기도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혼자서 몰래 먹는 경우도 많았다.
 
수용소에서는 내가 속한 작업반 60명 중에서 20명이 넘게 영양실조로 죽었다.
 
젊은 사람들은 통강냉이밥에 빨리 익숙해질 가능성이 높지만 나이 든 사람들, 특히 수감되기 전 강냉이밥을 접해보지 않았던 높은 간부들은 식사를 전혀 소화시키지 못해서 몇 달 만에 죽고 만다.
 
한 번은 함흥 출신의 70 넘은 박사가 들어왔는데 세 달 정도 버티다 그대로 죽고 말았다.
 
공개처형으로 죽은 사람은 2명이 있었다. 당시 혁명화구역에 수감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말실수로 김일성을 욕하거나 체제를 비판하다 들어온 경우다.
 
그 외에 중국에 가서 선교사나 남한 사람을 만나거나 남한 라디오방송을 듣거나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죄목도 있었다.
 
최고가 되어 장군님을 철저히 옹호보위하자
 
나의 절친이었던 김철웅이 요덕에 수감된 이유는 친구들과 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한창 혈기 왕성하던 십대 때 이들은 군대와 과학, 사회에서 최고가 되어 장군님을 철저히 옹호하자는 결사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반동으로 걸려 잡혀 들어왔다.
 
북한에서는 사조직체 결성이 철저히 금지되지만 진짜 반역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에서 만든 조직체였음에도 반동으로 걸린 것이다. 참 웃기는 나라다.
 
죽음도 웃음거리가 되는 곳
 
요덕에서는 죽음이 익숙했다. 영양실조 등 각종 병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게 흔한 일이어서, 죽음에 무감각해진다.
 
한번은 함경남도 도안전부 참모장으로 있던 사람이 요덕에 들어와서는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때는 겨울이었고 땅이 꽁꽁 얼어있었다.
 
 공동묘지로 올라가는 길이 매우 가팔라 어려웠다. 앞에서 관을 들고 가던 사람이 넘어지면서 무거운 관에 머리를 찧자 부아가 치밀었는지 욕지거리를 하면서 관 밖으로 튀어 나온 참모장의 머리를 발로 힘껏 걷어차며 “참모장 하면서 인민을 착취한 것도 모자라서 죽어서도 나를 죽이려고 들어!” 라고 질러댔다.
 
사실 사람이 죽고 죽은 사람을 걷어차는 그 상황이 비극적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웃겨서 삼십분을 서서 웃었다.
 
수용소에서는 바로 어제까지 나와 함께 일하고 식사하던 멀쩡한 사람도 다음날 아침에 보면 죽어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이 죽으면 경비나 보위지도원에게 보고하고 시체를 묻는 것이 전부다.
 
시체를 묻어주고 오면 국수가 추가적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시체 묻는 일을 하겠다고 난리였다.
 
죽음은 대수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의 평범한 일부분일 뿐이었다.
 
김수철 (요덕수용소, 1992~1995 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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