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연재수기 "감옥체험기 제3부"
상태바
탈북자 연재수기 "감옥체험기 제3부"
  • 박영애 기자
  • 승인 2012.10.02 12: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凍土(동토-얼어붙은 땅)
내가 죽으면 우리 집 식구들은 또 어떻게 하나. 그런 저런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흘렀다.
 
인민재판
나하고 한 감방에 있던 언니가 식구들하고 같이 몽골에서 붙잡혀 왔는데 이제 취급이 다 끝나면 정치범 교화소에 가야 한단다.
 
애들은 청진에 있는 고아원에 버려지고 남동생하고 남편이 같이 있었다.
 
그 언니는 교화소에 갈 생각을 하니 너무 무서워 하루에 서너 번은 기절한다.
 
몇일이 지나서 모든 감방 죄수들을 불러 내오더니 남자 손과 여자 손을 한 쌍씩 수갑을 채우고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우리가 머리를 숙이고 걸어가자 선생이 하는 말이 "야 다들 머리 높이 쳐들라우. 동북 여행을 다 하고 왔는데 뭐가 무서워? 머리 다 들라우"그런다. 흥! 동북이란 말은 어찌 알가? 나는 걸어가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

선생이 하는 말이 영화관에서 군중 심판을 한단다.
 
우리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안서장이 나와서 누구는 언제 중국에 갔으며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살았고 어찌 하여 붙잡혀 나오게 됐다고 자세히 보고를 한다.
 
남조선 괴뢰도당들은 이틈을 타서 우리 같은 탈북자들을 이용하여 안으로부터 와해를 시키려 든다고 말도 안 되는 엉터리를 불어친다.
 
나는 연변에 있을 때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선생님이 쓰신 회고록을 비롯해 일찍 탈북해 한국에 간 탈북자들이 쓴 글이나 그 내용을 주제로한 영화도 여러 번 봤었다.
 
나는 그걸 보고서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사실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꼭두각시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고 배가 고파 나무껍질을 벗겨먹으면서도 풀뿌리를 캐어 먹으면서도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치고, 한목숨 바칠 각오를 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막 소리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불쌍한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렇게 못사는 게 다 철천지 미국 놈들과 남조선 괴뢰도당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함흥에서 군사 복무를 22년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알고계신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미국 놈이고 철천지 원쑤이다.
 
나는 집에서 아버지와 몇 마디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를 못했다.

내가 슬그머니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기회에"아버지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지 아요?”그러자 아버지가 험한 얼굴을 하시고 몰라서 묻냐고 나를 노려보시는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와 한마디도 하지를 않았다.
 
군중심판이 끝나고 나가는데 앉아 있던 사람들이 마구 일어나서 우리 머리를 끄당기고 가래침이 날아오고 잣 껍데기가 날아오고 우리는 넘어져서 발길에 채우고 짓밟히고 그렇게 한 삼십 분을 당하고야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창피하지가 않았다.
나는'이 우물 안에 개구리들아 정신 좀 차려라'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삼 일이 지났는데 청년 동맹원들만 또 불러내어 영화관에서 사상 투쟁회를 한단다. 감방 안에 청년 동맹원이 모두 여자 둘 남자 둘이였다.
 
보안서장이 보고를하고나서'다음은 비판이 있겠습니다'하자 사람이 저저마다 일어나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어찌 키워주고 먹여주고 무료로 공부도 시켜준 장군님 은혜를 잊고 조국을 배반하고 중국에 갈수가 있냐고 집중 공격을 한다.

이런 배반자들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다며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울분에 차서 토론을 한다.
 
아니 우리가 뭐 조국을 배반하고 싶어서중국에 갔어요?배가 고파서 먹을 걸 찾아갔지. 사상 투쟁회는 세 시간이나 걸렸다.

끝이 나고 감방에 돌아가는데 선생이 "니들 속으로욕하려면 해라.나는 그래도 또 간다. 지금 그렇게 생각을 하구 있지"그런다.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은 왜 해요?'그렇게 두 번이나 군중심판을 받고 이제 재판도 받아야 한다.
세 번이나 당해야 한다.
 
내 재판은 12월에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다.
 
나를 불러내더니 재판 받으러 가잔다.

재판을 받으러 가니 내가 다니던 공장 사람들이 다 모이고 집식구들도 다 모였다. 재판장이 내가 한국에 가려다가 붙잡힌 게 아니고 중국에 있다가 왔기에 관대하게 봐준다며 1년 판결을 내렸다.
 
나는'흥 1년이면 금방인데 감옥에서 나오는 날로 다시 간다.'그렇게 속으로 생각을 했는데 나에게 그 1년이 그렇게 비참한 1년이 되고 10년만큼 길게 느껴질 줄을 나는 몰랐다.

예전에 감옥에 갔다가 온 사람이라고 하면 모두가 업신여기고 따돌림을 당하고 그랬는데 내가 죄수가 되여 감옥에 다 가다니 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그것도 배가 고파 먹을 걸 찾아 갔다는 게 죄가 되어…재판이 끝이 나고 집식구들과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준다고 취급실로 다 불렀다.
 
감방안에서의 생일
생일이라고 집에서 없는 살림에 하얀 밥을 해오고 계란을 삶아왔다.
 
나만 혼자 먹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내가 아무리 권해도 드시지를 않았다.
 
목이 메여 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12월 22일 제일 추운 동짓날에 우리는 감옥에 가는길에 나섰다.
 
가게 된 곳은 평안남도 증산군에 있는 11호 단련대란다.
 
엄마는 집에 있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은다 팔아 콩을 사 그걸 볶아 갈아서 10킬로가 되게 나에
게 감옥에서 먹을 식량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그걸몰랐는데 그 콩가루가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거기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가는 길에 나는 너무도 무거워 그걸 다 두고 갈려고했는데 선생이 하는 말이 그게 없어서 죽은 애들이 많으니 무거워도 다 가지고 가라고 했다. 나는 무서웠다. 
 
나도 갔다가 죽으면 어찌하나! 죽으면 중국에 다시 못 가면 어떻게 하지, 내가 죽으면 우리 집 식구들은 또 어떻게 하나. 그런 저런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차가 없어서 우리는 삼십 리를 걸어서 연수라는 곳까지 갔다가 겨우 청진까지 가는 차를 잡아 탈 수가 있었다.
 
청진 역에 도착을 하니 대합실에는 거지들이 욱실거리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비닐박막을 펴고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사이로 거지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사이사이를 누비고 다니고 있었다.

한쪽에서는'꽃 사세요. 꽃 사세요'하면서 다니는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면 그 여자를 둘러싸고 남자들이 흥정을 한다.
 
나는 처음에 무슨 꽃을 팔러 다니는지 궁금해서 우리를 호송하는 선생에게 물어보았는데 몸 파는 여자들이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 어떻게 북한에도 몸 파는 여자들이 다 있는가. 말로만 사회주의요, 뭐요, 하지만 이미 북한은 내부로부터 이미 썩을 대로 썩고 부패가 되어있는 상태이다.
 
그렇게 쓰레기를 주어먹고 몸을 팔면서 살아야 하면서도 김정일 장군님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는 노래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기가 막혔다.

청진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20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손에 손을 밧줄로 이어 묶고 갑자기 들이 닥치는것이다.
 
모두가 월경자들이란다.
 
지금 호송이 되여 가는중이란다.
 
그중에는 할머니도 있었다.
 
청진 역에서 하루를 기다렸는데 기차가 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오를 수도 없었다.
 
그러자 선생이 우리 손에 수갑을 채우고 소리를 지르란다. 같이 가던 애들이 수갑 찬손을 마구 흔들면서 길 내라 길 내라 하니까 사람들이나이도 많지 않은 여자들이 손에 수갑을 차고 마구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보면서 슬슬 피한다.

덕분에 우리는 기차에 오를 수가 있었다.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콩나물시루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 위로 어떤 사람들은 벌벌 기여 다니기도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숨쉬기도 힘들었다.
 
범죄 후송이기에 우리는 단속 칸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는 없어 그냥 서서 가지 않으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가야 했다.
 
손에는그냥 수갑을 차고 있었다.

정전이 되면 기차는 가다가도 멈춰 서곤 했는데 어떤때는 다리를 건너다가도 멈춰 서서 반나절이 걸려서야 다시 움직일 때도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만한 거리인데 한국은 두 시간이면 간다고 하는데 그만한 거리를 우리는 일주일을 갔다.
 
(제4부에서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