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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춘추와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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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춘추와 연개소문
  • 노승일
  • 승인 2021.08.26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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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청원구청 산업교통과 한현구 교통지도 팀장
청주시 청원구청 산업교통과 한현구 교통지도 팀장
청주시 청원구청 산업교통과 한현구 교통지도 팀장

7세기에 들어서자 (고)조선 대륙과 한반도에서 삼한일통을 이루고자 고구려, 백제, 신라 간 전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비단 삼국뿐만 아니라 돌궐, 일본, 당나라 등이 얽힌 국제전이라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고구려에는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백제에는 성충과 계백이, 신라에는 김유신과 김춘추 같은 쟁쟁한 인물이 있었다.

국가 간 외교와 동맹 관계가 숨가쁘게 변화하고, 각국 내부의 양상이 시시각각 달라져 쉽사리 성패를 가름할 수 없었다.

김유신의 나이 30세 무렵인 어느 날, 유신의 누이 가운데 언니(보희)가 산꼭대기에서 오줌을 누다 서라벌이 다 잠기는 기이한 꿈을 꾼다.

여동생(문희)이 꿈 얘기를 듣고 언니로부터 꿈을 산다. 그 뒤 김유신의 집을 김춘추(9살 연하)가 방문하게 되었을 때 문희와 인연을 맺어 그의 배필이 되기에 이른다.

두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진 것이다. 진골 출신의 춘추는 당대 외교의 달인이었다.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방문하여 실력자인 연개소문과 회담했고 일본에도 들려 사정을 살핀다.

연개소문은 백제를 우선시하여 신라와의 동맹을 거절한다. 이에 춘추는 당나라를 찾아가 모의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치기로 한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은 젊은 시절에 신라의 성, 40여 개를 빼앗고 해동증자로 불릴 만큼 효성도 지극했다.

첩보전에 능한 김유신의 이간계에 의하여 점차 충신과 명장을 멀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과 신라는 조정이 분열된 백제를 먼저 도모하였고 한직으로 쫓겨난 계백은 5천 결사대와 함께 하릴없이 황산벌의 귀신으로 화한다.

고구려의 동맹국이 당에 의하여 망하거나 돌아서고 개소문이 죽은 뒤 남생을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내분하는 틈을 타서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왜국은 모국으로 숭앙하던 백제가 망한 후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수백 척의 전선과 상당한 병력을 파병하여 돕고자 하였으나 나당 연합군과의 해전에서 패하여 무산된다.

나당이 고구려의 숨통을 끊으려할 때 신라는 가능한 병력을 아끼면서 전력을 다하지 않은 듯하다. 앞날을 염려해 막판에 숟가락을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가 망한 후 당은 신라마저 삼키려 했고 양국은 7년간의 치열한 나당 전쟁을 벌이게 된다.

문무왕은 유신의 자문을 받고 여러 장수를 기용하여 수륙전을 승리로 이끌어 당군을 대동강 위쪽으로 몰아낸다.

만일, 당시에 백제를 견제하려던 신라(김춘추)와 당이 아닌 고구려(연개소문)간 동맹이 전격 성사되었다면 삼국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아마도 양국 연합군이 백제를 먼저 친 후 신라가 백제를 차지하고 이어서 신라와 고구려가 힘을 합하여 당나라를 물리쳤을 개연성이 크다.

그리 했다면 삼국의 흥망성쇠는 물론 그 뒤 우리나라 역사와 영토의 양상이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변으로 국가 권력을 잡은 걸물로 고·당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외교전은 김춘추에게 패하였다.

춘추는 세 치 혀로 고구려를 도모했으니 그보다 한수 위라 하겠다. 두 인물은 자녀 교육에서도 승패가 갈린다.

김춘추(태종무열왕)는 자식(문무왕)을 잘 길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만, 연개소문의 자식들은 반목해 큰 아들 남생이 고급 정보를 당에 넘기고 길잡이가 되어 조국의 멸망에 일조했으니 말이다.

장래에 삼국의 7백여 년 역사를 새롭게 서술하거나, 소설로 짓는다면 중국의 삼국지나 연의를 능가하는 역사서가 되고 문학작품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K-역사가 세계사 무대를 뒤흔들며 등장할 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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