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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엑스포과학공원 새로운 비상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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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엑스포과학공원 새로운 비상 꿈꾼다
  • 육심무
  • 승인 2014.04.28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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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획 ] 1993 대전엑스포의 태동과 준비

[게재 순서]

1. 1993 대전엑스포의 태동과 준비
2. 대회 개최 - 손에 손잡고
3. 대전엑스포 과학공원의 시련
4. 엑스포 재창조 계획
5. 대전엑스포 과학공원의 미래


[대전=동양뉴스통신] 육심무·김혜린 기자 = 국내외에서 1400여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93대전엑스포는 대전의 이미지를 한빛탑과 과학도시로 정립시키고 도우미라는 신조어와 새로은 직업을 탄생시키는 등 우리나라 마이스산업을 태동시키는 시발점이 됐다. 

대전지역의 발전을 10년은 앞당겼다는 대전엑스포는 행사 종료 이후 20여년간 숱한 우려곡절을 겪으면서 이렇다 할 활로를 찾지 못해 시민들로부터 애물단지 취급을 받다가 21년만에 엑스포 재창조 사업을 통해 완벽한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987년 대통령선거 유세과정에서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충청지역 공약으로 태동했던 대전 엑스포는 행사 이후 각종 규제와 정부부처간 이해관계가 얽혀 기금을 소진하고 계속되는 운영난으로 인해 엑스포과학공원 법인이 정부로부터 강제 청산명령을 받는 지경에 이르러 2011년에는 대전마케팅공사로 통합됐다.

10차례에 이르는 대전엑스포 활성화 계획은 매번 시행조차 하지 못한 채 용역으로만 머물렀던 대전엑스포는 올해 대전엑스포 재창조 사업으로 기초과학연구원 건립과 고화질 드라마타운 조성 사이언스 콤플렉스 사업 등이 확정되면서 옛 모습의 상실은 불가피해졌다.

이미 시작된 고화질 드라마타운 건립과 기초과학연구원의 입지에 이어  사이언스콤플렉스 민간 사업자 공모가 시작되면서 20년간 유지됐던 엑스포장의 원형은 엑스포 기념구역의 한빛탑과 일부 기념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될 예정이어서 현재의 모습은 20년의 영욕을 품고 역사속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올해 고화질 드라마타운 건설과 기초과학연구원 건립 및 사이언스콤플렉스 공모 등을 계기로  대전엑스포의 어제와 오늘의 영욕을 조명해 보고, 미래의 청사진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1. 93대전엑스포의 태동과 준비

 
대전세계박람회의 태동은 1987년 대선 선거과정에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전과 충청지역의 표를 얻기 위해 세계박람회 개최를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비롯됐다.

노태우 후보 선거팀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가 출마한 당시 대선과정에서 대전지역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올림픽 및 축구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이벤트로 일컬어지는 국제박람회 개최를 충청지역의 공약으로 내세웠다.

경제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박람회를 통해 국위선양은 물론 지역의 발전을 한 세대 이상 앞당길 수 있다는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밀었다.

정부를 등에 업은 여당 후보의 경제올림픽 공약에 대해 당시 야당후보들은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박람회 개최를 공약하는 것은 빌 공자 공약이며 국제박람회 조직위의 개최 일정 등을 들어 불가능하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 당선 후 국제박람회 기구에서 4년마다 개최되는 정규 박람회는 이미 12년간의 일정이 확정된 상황이어서 정기 국제박람회 개최아 어려움에 따라 최초의 전문박람회로 조율해 1990년 12월 국제박람회기구(BIE)총회에서 1993년 개최를 공식 승인 받았다.

한국의 엑스포 개최가 결정되자 개최 장소를 놓고 지방정부들의 유치활동이 벌어졌다.

21년전 2조원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된 엑스포는 개최지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호재임이 분명함에 따라 당초 충청지역의 대선 공약이었으나 서울 등 수도권이 국제 대회를 치른 경험과 외국에서의 접근성, 문화 숙박 시설 등을 내세워 충청지역의 공약임을 흐리려고 애썼다.

대전직할시는 89년 충남도에서 분리 독립한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청남대에 휴식차 내려오는 때 등을 이용해 대전 개최가 공약이었음을 상기시키고 개최지로 조기 확정할 것을 건의하는 등 대전엑스포 지키기에 주력했고, 결국 문광부 장관이 대전 도룡벌에서 엑스포가 개최됨을 발표했다.

정부는 청소년들에게 21세기의 비전을 제시하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경제발전의 요체가 되는 과학 기술의 획기적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엑스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또 국민의 사회 문화적 의식 수준을 함양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위한 국민적 역량을 재결집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세계 속에 한국의 역량을 과시하고 개발도상국들에게는 발전의 의욕과 희망을 제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아울러 지구 자원의 효율적인 이용과 환경을 위한 재활용 기술의 개발, 새로운 기술, 문화 정착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장을 마련하겠다고 제시했다.

이후 관계자들은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대회개최를 위한 강행군이 시작됐다.

대회장소로 결정된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일원은 당시 갑천 양안 모두 접근로 조차 없는 불모지 상태였다.

‘91년 4월 12일 국내외 귀빈들이 참가한 가운데 도룡벌에서 대전엑스포´93 현장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엑스포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이어서 대전엑스포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국민 홍보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대전시는 당시 노병찬 시정과장에게 한밭도서관에 엑스포 교실를 열어 엑스포의 개념부터 손님맞이 까지 행사에 필요한 교육을 시작하도록 했는데 6개월간 1만명에 달하는 대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교육에 참여해 높은 기대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엑스포의 개념부터 손님맞이 까지 행사에 필요한 교육을 시작했고, 정부에서는 전 국무위원, 각 부처의 장, 대전직할시장을 위원으로 한  대전세계박람회 정부지원위원회를, 국회도 20명의 위원으로 국회박람회지원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지원에 나섰다.

해외 홍보를 위해 스페인 엑스포, 일본 오사카 미도스지 퍼레이드 등의 이벤트에 참가해 대전엑스포를 알리고, 외교 채널을 통해 해외 각국의 참가를 유도했으나 초창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92년에는 미인대회 입상자들을 홍보사절로 선정해 세계 각국을 돌며 대전엑스포 ‘93을 홍보하기도 했는데, 일부 재야 인사들은 현대판 미인계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대회개막 300일을 앞둔 92년 10월 엑스포 행사장 건설 공정률이 50%를 넘지 못했고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경우라면 이처럼  짧은 기간에 공사를 마칠 수 없을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우리의 가장 협조적인 우방인 미국의 경우 93년 2월에야 대전엑스포 참가를 통보할 만큼 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한국이 불과 2년여만에 경제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박람회를 치르기에는 역부족이며, 행사의 내용도 부실할 것이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대전엑스포에 앞서 1992년 스페인에서 92세비아엑스포가 열리는 것도 다른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갈 수 밖에 없었고, 전문박람회도 최초로 도입된 개념이어서 조직위는 애를 태워야했다.

국내 기업들의 경우도 엑스포에 대한 경험이 없고 막대한 행사 비용이 부담스로운데다가 세계에 내세울만한 첨단 과학기술도 없어 참여를 꺼렸다.

전직 체신부 장관 출신인 오명 조직위원장이 국내 기업들의 참여를 권유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일부 대기업은 사장 면담은 커녕 일개 과정에게 응대하도록 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정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한국통신공사와 담배인삼공사 등 국영기업이 먼저 참여를 선언해 분위기를 이끌었고, 기아자동차과 기념관 건립과 행사 차량 지원을 약속하면서 활로를 찾게 됐다.

92년 10월 5일 스페인 세비아 엑스포의 BIE의 날 행사에서 BIE기(旗) 인수식이 열려 오명 조직위원장과 당시 김주봉 대전직할시장이 테드 알렌 의장으로부터 엑스포 깃발을 넘겨받았다.

1993년에 들어서면서 정부와 조직위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참가를 통보한 국가가 100개국을 넘어섰으나 전시내용 조차 조직위에 알려주지 않는 국가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참가국들이 대회 참여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으로 행사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민 관 군이 총동원돼 행사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엑스포 기간중 ’엑스포의 꽃‘으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던 도우미 선발에는 800명 모집에 2만2천명이 신청해 역대 엑스포 컴패니언 모집 사상 최고인 27대1이라는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다.  

컴패니언이라는 명칭이 우리말 도우미로 자리잡은 것도 대전 엑스포를 통해서이다.

엑스포 개막 100일을 앞둔 4월 중순 대회장 건설 공정률이 90%에 근접했고, 4월 29일에는 시민, 도우미, 자원 봉사자 등 1만2000명 참가한 가운데 대전엑스포 ‘93 성공다짐대회가 열렸다. 

개막 50일 전인 5월 21일부터 6월 25일까지는 강원도를 시작으로 전국 14개 시도에서 ‘엑스포의 밤’이 열려 엑스포에 대한 범국민적 참여 분위기를 전국으로 확산시켰고, 7월 7일에는 개막 30일 전 행사의 일환으로 엑스포 경비단과 방제단, 도우미 발대식이 열렸다.

7월 8일에는 엑스포 기간 중 행사, 운영 요원과 국내외 관람객의 숙소로 사용될 엑스포 타운이 개촌식을 가졌는데, 당시 전민동에 건설된 숙소는 분양아파트로 행사 기간 중 주방시설 등은 보호막으로 덮어놓고 사용해야 했다.

8월 2일부터는 엑스포장내의 각종 정보와 공연 실황, 교통 정보 등에 대한 종합안내를 위한 방송 시스템인 대전엑스포 FM 방송국‘이 송출을 시작했는데, 이 방송은 폐막 때까지 엑스포장을 중심으로 매일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반경 50km까지 엑스포에 대한 정보를 전했다.

대전엑스포 개막을 앞두고 대회장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일부 전시장의 배수 시설에서 문제점이 발견돼 철야 작업이 진행됐고,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마련했던 일부 행사들이 취소되는 등 긴장이 극에 달한 가운데 개막일이 서서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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