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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위로(慰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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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위로(慰勞)
  • 서다민
  • 승인 2023.12.27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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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범 교수의 세상을 보는 눈
강경범 교수.
강경범 교수.

[동양뉴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매년 해가 바뀌는 자정 즈음 제야의 종(除夜-鐘) 소리를 시작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소중한 분들과 함께 갑진년(甲辰年) 새해를 맞이한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울리는 소리가 아닌 타인에게 평안과 행복을 선사하며 감동을 주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까닭이다. 한 해를 돌이켜 볼 때 비가시적(非可視的) 차원에서 우리의 삶은 매순간 무엇을 선택하며 결정하고 살아왔는가. 비록 더 이상 스스로 정당화(正當化) 시킬 수 없다면 과거와 현재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보다 때론 상처받고 병든 심성을 지난 시간의 그릇에 담고 무시간적 현재의 시간에 머물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희망(希望)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나온 세월 삶 속에 존재하는 많은 인간관계(人間關係)를 나름 경험하였으나.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의식 속에 독립(獨立) 된 관계의 형성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그 자체의 본성(本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관계 형성에 있어 주관적이나 객관화된 사고의 미학적(美學的) 접근 방법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는 허공에 쓸데없이 날갯짓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에 머물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인간관계의 정점을 찍는 사고(思考)에서 비롯되는 것이 가족관계로 회자(膾炙) 되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연말연시(年末年始) 특정한 관계에 대하여 논(論)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삶(人生)이란 인간의 원초적(原初的) 본성(本性)에서 나온 욕구에 따라 자신의 의지(意志)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매 순간순간을 선택하며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가치(價値)를 인정(認定) 받고 위로(慰勞) 받고 싶은 것이 나약한 인간의 속성(屬性)이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에 적응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하여도 자신에게 불리할 경우 타인의 윤리적 도덕적 당위성(當爲性)에 대한 지배를 대부분 거절하는 이유이다. 계묘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당연히 그러듯이 각종 포털사이트나 메신저에 새해 인사와 더불어 희망을 암시하는 신년휘호(新年揮毫)가 넘쳐난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 주는 그 고마운 애심(愛心)에 때 묻은 발자국을 씻어내며 소망을 녹여 그릇에 담아놓으며 소소한 것에도 감사함을 느낀다. 세월이 흘러 언제부터인가 소박한 삶의 파노라마는 하찮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사다난(多事多難) 한 계묘년이 꼬리를 내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내면에 조망(眺望) 된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아닐까. 이 겨울 누군가 한편에서 낯선 과제(課題)를 들고 현재의 상황을 극복(克服)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Einführung in die MetaphysIk)”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즉 이미 형성된 언어의 개념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말과 언어는 쓰고 말하는 사람들의 교섭을 위해 사물들을 포장하는 포장지가 아니다. 오히려 사물들을 존재케 하고 또 그 사물들의 사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과 언어”라 하였다. 우리는 무대 위에 올려진 자신의 삶을 공연하는 데 있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事件)들이 어쩌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기 위한 현재의 지평(地平)과 마주하기 위한 방황하는 산물(産物)이리라. 매서운 바람에 떨어진 꽃잎을 보며 옷깃을 여민다. 이 순간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때로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어렵게 힘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지만, 터널 속에 갇혀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진심 어린 따뜻한 말과 행동을 그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攝理) 앞에 말문을 닫을 때 세상에 미운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 속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공간적, 정태적(靜態的)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나 때론 주위를 둘러보며 지친 자에게 삶의 잔이 넘치기를 소망하며 진심 어린 위로(慰勞)의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사랑을 베풀어 보자.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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