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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칼럼] 왜 가족이 힘들까?-검정 캡모자를 눌러쓴 외로운 40대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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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칼럼] 왜 가족이 힘들까?-검정 캡모자를 눌러쓴 외로운 40대 남성
  • 김원식
  • 승인 2024.03.29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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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상 박사&송유미 교수의 '우리 家 행복한 家'
송유미 대구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소장)​

[동양뉴스] 검정색 캡모자를 쓴 40대 후반의 미혼 남성 A씨를 만났다.

모자를 너무 눌러쓴 바람에 코와 입만 보였다. 답답했다.

A씨 자신도 답답해하고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첫 질문에 그는 한숨만 깊이 내쉬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A씨와 같은 사람들은 사회복지사나 상담사를 만나려고 할 때, 일자리나 경제적 어려움 등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다.

그도 역시 그랬다.

일차적으로 지역의 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에게 의뢰하여 그가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받을 수 있게 하였고, 필자와는 몇 회 동안 상담을 받도록 권했다.

‘내적 대상관계’를 중시하는 필자로서 푹 눌러쓴 캡모자만 봐도 A씨의 ‘내적 대상관계’ 형태가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내적 대상’이란 양육자(특히 어머니)의 이미지나 생각, 감정, 기억 등을 말한다. 

◇ '내적 대상' 엄마는 무섭고 불안한 대상

어릴 적 A씨의 엄마는 그를 돌볼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장남인 A씨에게 동생들을 잘 챙기라는 주문만 했던 것 같다.

본능적으로 A씨는 스스로를 중요시하지 않고,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동생들에 대해 나름 열심히 돌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엄마는 야단치고 소리 지르기 일쑤였다. 억울했다.

엄마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도 못했다.

엄마는 옆에 다가가기에 무서운 존재였고, 포근하기 보다는 가슴만 쿵쾅쿵쾅 거리게 하는 불안한 대상이었다. 

성인이 된 A씨에게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30대까지만 해도 가끔 만남을 주선해 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누가 나 같은 남자를 좋아하겠냐’며 만남 자체를 거부했고, 거부하면서도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양가감정이었다. 그러나 만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방구석에서 두 다리가 저릴 때까지 웅크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결혼 자체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하단다. 

다 큰 어른인데 A씨가 참 처량하고 외로워 보였다.

지금껏 버텨온 세월을 봤을 때 안쓰러웠다.

처량함, 외로움, 안쓰러움. 필자가 받은 느낌이지만, A씨와 상담을 하면서 그의 내면에서 그 느낌들이 계속 묻어났다.

이것들이 A씨 전부인 듯해 안타까움이 컸다.

◇ 여자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결혼도 포기

필자는 A씨를 위로하고, 그의 내면에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

“너무 힘든 삶을 살았군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당신을 위로해 줄 친구 하나 없고, 형제 하나 없고, 당신의 편이 되어 줄 부모도 없이, 어린 아이한테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아이였을 때 많은 사랑을 받았어도 성인이 되어 살아가려면 힘든데, 어른도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A씨의 눈은 힘이 들어가면서 붉게 변해 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힘주어 참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었다면, 엉엉 울어도 되었을 텐데 성인이다 보니 그조차도 스스로 용납이 안 되었다.

휴지를 내밀었다.

“울어도 됩니다.” 쓰고 온 검정 캡모자를 더 눌러쓰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복받쳐 오른 감정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가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엄마가 돈 버느라, 무능한 아버지의 폭력에 우리 아가를 돌봐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무 죄 없는 너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 지르고 때려 미안하다. 그래도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잘 견디어 주어 고맙구나.”

◇ 엄마와는 다르게 자기 스스로를 대해야

필자는 A씨 내면의 아이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자기 내면을 객관적으로 알게 해 주고, 왜 지금껏 혼자서 외로운 광야를 떠돌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더 이상 내면의 아이를 광야에 둘 문제가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함께 맞잡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최대의 적은 바로 자기 자신! 이제부터 A씨는 자신을 대했던 엄마와는 다르게, 그때 엄마로부터 받고 싶었던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대할 것을 권했다.

쉽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게 편한 듯 했다. 

애착이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시기를 놓치면, 이후 수십 배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A씨는 고통이 거듭되더라도 내면에 도움이 되는 고통임을 경험하면서 스스로에게 유연해 지기 시작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받아들이는 충분한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필자는 A씨가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 안에 들어올 것을 허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 모자를 푹 눌러쓴 A씨가 아니라 모자를 벗어 던진 A씨로 살 것이라고 믿는다.

아름다운 이 봄날에 A씨에게도 한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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